레알 마드리드 CF
안녕하세요!
오늘은 스페인 라리가의 명문!
바르셀로나와 양대산맥으로 우승을 노리는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시즌 살짝 삐긋하기는 했지만
지단감독의 복귀와 함께 빠르게 반등하고있는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이름 | 레알 마드리드 CF Real Madrid Club de Fútbol |
별칭 | Los Blancos (하얀 군단) Los Merengues (머랭) Los Vikingos (바이킹) |
설립 연도 |
1902년 3월 6일 마드리드 축구단(Madrid Football Club)의 |
경기장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
수용 인원 | 81,044명 |
회장 | 플로렌티노 페레스 |
감독 | 지네딘 지단 |
리그 | 라리가 |
2017-2018 순위 | 3위 |
레알 마드리드 클루브 데 푸트볼 (스페인어: Real Madrid Club de Fútbol reˈal maˈðɾið ˈkluβ ðe ˈfuðβol[*], 왕립 마드리드 축구단) 은 흔히 레알 마드리드 (스페인어: Real Madrid) 혹은 스페인 밖에서 줄여서 레알 (스페인어: Real) 로 알려진 프로 축구 구단으로 스페인의 마드리드 지방 마드리드를 연고로 한다.
1902년 마드리드 축구단 (Madrid Football Club) 으로 창단한 이 구단은 전통적으로 백색 주 유니폼을 입었다. '레알'이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왕립'이라는 뜻을 지니며, 1920년에 알폰소 13세로부터 명칭을 하사 받으면서 엠블럼에 왕관이 추가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1947년부터 안방 경기를 85,454명의 관중을 수용 가능한 마드리드 도심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치렀다. 다른 대부분의 유럽 구단들과 대조되게, 레알 마드리드는 회원들 (socios, 소시오) 이 구단을 소유하고 운영해 왔다.
구단은 2015년에 €3.24B의 매출액을 올렸고, 2014-15 시즌에는 최고 매출액을 기록한 축구단으로 기록되었는데, 연간 €577M의 매출액을 올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응원받는 구단이기도 하다. 레알 마드리드는 프리메라 디비시온 출범의 원년 참가 구단들 중 1부 리그에서 강등된 적이 없는 3개의 구단들 중 하나로, 나머지 두 구단들은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틱 빌바오이다. 구단은 다수의 타 구단들과 오랜 기간의 숙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가장 알려진 숙적으로는 엘 클라시코 (El Clásico) 에서 맞대결을 펼치는 바르셀로나이고, 다른 하나는 마드리드 더비 (El Derbi madrileño) 의 맞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1950년대에 스페인과 유럽 축구계의 주요 강자로 자리매김했는데, 유러피언컵을 5번 연속 우승하고 7번 결승에 올랐다. 이러한 성공을 자국 리그에서도 거두었는데, 구단은 7년의 기간동안 5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푸슈카시 페렌츠, 프란시스코 헨토, 레몽 코파, 그리고 호세 산타마리아와 같은 선수들로 구성된 당시의 선수단은 체육계에서 역대 최고의 단체를 거론하면 손꼽히는 선수단이다.
현재 라 리가 최다인 33번의 우승을 거두었고, 코파 델 레이를 19번,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9번, 그리고 코파 에바 두아르테와 코파 데 라 리가를 한 번씩 우승했다. 국제 무대에서, 최다인 12번의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를 거두었고, 공동 최다인 3번의 인터콘티넨털컵, 2번의 UEFA컵, 4번의 UEFA 슈퍼컵, 그리고 한 번의 FIFA 클럽 월드컵 우승을 거두었다.
2000년 12월 23일, 레알 마드리드는 FIFA 20세기의 구단으로 선정되었고, 2010년 5월 11일에는 IFFHS로부터 20세기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 선정되었다. 구단은 2004년에 FIFA 100주년 명예의 훈장을 받았다. 구단은 최근 IFFHS의 구단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있으며, 최다 점수 기록도 세웠다. 구단은 UEFA 구단 랭킹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기원은 축구가 마드리드의 몇몇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생들이 포함된 자유 교육 단지 (Institución Libre de Enseñanza) 의 교사진과 학생들에게 전파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협력하여 1897년 스카이 축구단 (Football Club Sky) 을 창단해 몬클로아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경기를 펼쳤다. 이 구단은 1900년에 둘로 갈렸다: 마드리드 신축구단 (New Foot-Ball de Madrid) 과 마드리드 축구단 (Madrid Football Club) 이 그들이다. 1902년 3월 6일, 후안 파드로스를 새 이사진이 선출되었고, 마드리드 축구단이 공식적으로 창립되었다. 창단 3년 후인 1905년, 마드리드 축구단 (Madrid FC) 은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첫 우승을 차지했다. 구단은 1909년 1월 4일 스페인 왕립 축구 협회의 원년 합류 구단으로, 당시 회장이었던 아돌포 멜렌데스가 협회의 창립 동의서에 서명했다. 구장을 여러 차례 변경한 후, 구단은 1912년에 오도넬의 구장 (Campo de O'Donnell) 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1920년 구단명은 알폰소 13세가 왕립(Real)의 명칭을 구단에 하사하면서 레알 마드리드로 개칭되었다.
1929년, 스페인 축구 리그가 출범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최종전이 열리기 전까지 선두로 나섰지만,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져서 바르셀로나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1931-32 시즌에 첫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리그를 2년 연속으로 우승해,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을 방어한 구단으로 이름을 올렸다.
1931년 4월 14일,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구단은 왕립 명칭을 상실하고 마드리드 축구단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축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되었고, 1943년 6월 13일, 마드리드는 경찰을 이용해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협박하여 바르셀로나와의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준결승 2차전에서 11-1로 이겼다. 당시 국왕컵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존중하기 위해 명칭이 개칭되었다. 엔리크 피녜이로 바르셀로나 회장은 마드리드 지지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증언들 중에서 진실로 밝혀진 것은 없고, FIFA와 UEFA는 결과가 문제가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
스페인 언론과 기자들 중, 후안 카를로스 파사몬테스는 조세프 바예 바르셀로나 선수는 스페인 안보군이 경기 전에 온 것을 부인했다고 말했다. 대신 전반전 후, 후안 호세 노게스 바르셀로나 감독과 선수단들이 거칠게 경기에 임한 레알 마드리드와 지나치게 열광적인 안방 관중들에게 분노했다고 덧붙였다. 그들이 경기장 복귀를 거부하자, 마드리드의 수석 서장이 접근해 신원을 밝히고 선수들로 하여금 경기장에 돌아오도록 설득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와 유럽 무대에서의 성공 (1945–1978)
1945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가 레알 마드리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임기에, 구단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과 시우다드 데포르티바 훈련장을 건립해 스페인 내전으로 피해를 입은 기반 시설을 복구했다. 더 나아가서, 1950년대에 전 레알 마드리드 아마추어 선수였던 미겔 말보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소년 아카데미, 혹은 "채석장" (cantera) 을 열었고, 오늘날에 공장 (La Fábrica) 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3년을 기점으로, 그는 해외의 세계구급 선수들을 영입하는 정책을 추진했는데, 가장 중요한 선수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꼽을 수 있다.
1955년, 프랑스의 스포츠 기자이자 레키프의 편집가인 가브리엘 아노가 유럽 전역의 구단들을 초대한 친선 대회를 출범시킬 생각을 제안한 것이 베르나베우, 베드리냥, 그리고 셰베시 구스타브와의 의견에 동의로 오늘날 UEFA 챔피언스리그로 알려진 대회가 출범케 했다. 결국, 베르나베우의 지도는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과 유럽 축구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를 확고하게 했다. 구단은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했는데, 이 중에는 햄던 파크에서 벌어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1960년 결승전에서 7-3으로 이긴 것도 포함한다. 대회 5연패 후, 레알 마드리드는 초창기 우승 트로피를 영구 소장할 권한을 얻었고, UEFA 명예의 배지를 사용할 권한도 얻었다.]
구단은 1966년에 같은 국적의 선수들로만 구성된 선수단으로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와의 결승전에서 2-1로 이기고 6번째 유러피언컵을 획득했는데, 이는 대회 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이 선수단은 예-예로 회자되었다. "예-예"라는 명칭은 비틀즈의 곡 "그녀가 당신을 사랑해"의 후렴구절 "예, 예, 예"에서 유래되었는데, 선수단의 4명이 비틀즈를 흉내낸 것을 마르카지가 촬영한 데에서 유래했다. 예-예 세대는 1962년과 1964년 유러피언컵에서도 준우승을 거두었다. 1970년대에, 레알 마드리드는 5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컵 대회 우승을 거두었다. 구단은 1971년에 처음으로 UEFA 컵위너스컵 결승전에 올랐지만 잉글랜드의 첼시에게 1-2로 패했다. 1978년 7월 2일, 구단 회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아르헨티나에서 FIFA 월드컵이 진행되던 와중에 타계했다. FIFA는 대회 기간 도중 그를 기리기 위해 사흘의 애도 기간을 선언했다. 이듬해, 구단은 전 회장을 기리기 위해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초대 대회를 조직했다.
독수리 편대와 7번째 유러피언컵 (1980–2000)
198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국내에서 성장한 거물들이 국내무대에서 구단의 성공을 가져다 주기 전까지 라 리가 우승 트로피에 손을 대지 못했다. 스페인의 스포츠 기자 훌리오 세사르 이글레시아스는 이 세대를 독수리 편대 ("La Quinta del Buitre") 로 명명했는데, 명칭은 이 선수단의 일원이었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별칭에서 유래했다. 이 선수단의 다른 일원들로는 마놀로 산치스, 마르틴 바스케스, 미첼, 그리고 미겔 파르데사가 있었다. 이들 5명 모두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 아카데미 졸업생이었다. 독수리 편대 (이들 중 파르데사가 1986년에 레알 사라고사로 떠나면서 4인방이 되었다.) 는 수문장 프란시스코 부요, 우측 수비수 첸도, 그리고 멕시코의 공격수 우고 산체스가 합세해 레알 마드리드는 1980년대 후반에 스페인과 유럽의 최고 선수단을 보유했고, 두 차례 UEFA컵과 다섯 차례 스페인 리그를 연속으로 우승했고, 한 번의 코파 델 레이, 그리고 세 번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을 거두었다. 1990년대 초, 독수리 편대는 마르틴 바스케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그리고 미첼이 구단을 떠나면서 해체되었다.
1996년, 로렌소 산스 회장은 파비오 카펠로를 감독으로 내정했다. 비록 그의 임기는 1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으나,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정상에 올랐고, 이미 라울, 페르난도 이에로, 이반 사모라노, 그리고 페르난도 레돈도 같은 선수가 이미 선수단을 구성하고 있는 와중에 호베르투 카를루스,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다보르 슈케르, 그리고 클라렌서 세이도르프 같은 선수들이 합세해 전력이 크게 보강되었다. 그 결과, 레알 마드리드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1997년에 또 합세하며) 마침내 32년의 기다림 끝에 7번째 유러피언컵을 차지했다: 1998년,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지도 하에 결승전에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의 결승골에 힘입어 유벤투스를 1-0으로 이겼다.
2000년 7월,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구단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선거 공약으로 구단의 €270M의 빚을 청산하고 구단의 시설을 현대화 시킬 것을 내걸었다. 그리고, 첫 공약은 페레스가 당선해면서 숙적 바르셀로나로부터 루이스 피구를 영입하게 했다. 이듬해, 구단은 훈련장을 새단장하고 자금을 매 여름마다 세계구급의 거물들을 영입해 은하 군단 (Galácticos) 을 모집하는데 사용했고, 그렇게 모집된 선수들로는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호베르투 카를루스, 라울, 데이비드 베컴, 그리고 파비오 칸나바로가 있었다. 이 도박적인 감행이 값을 했는지 토론의 대상이 되었는데, 2002년에 UEFA 챔피언스리그와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거두고 2003년에 라 리가 우승을 거두었지만, 이어지는 세 시즌 동안 단 한개의 주요 대회 우승컵을 수집하지 못했다.
2002-03 시즌 라 리가 우승을 거둔 후 며칠 뒤 논란이 도마에 올랐다. 페레스의 논란이 될 첫 결정은 선수단을 우승으로 지도했던 비센테 델 보스케를 해임한 것이다. 10여명의 선수들이 구단을 떠났는데, 마드리드 주장이었던 페르난도 이에로도 나갔고, 수비형 미드필더인 클로드 마켈렐레는 급여가 적다는 이유로 훈련 참가를 거부하고 첼시로 떠났다. "참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선수들이 떠났지만] 바뀌지 않은 것은: 이기는 편은 바뀌지 않습니다." 라고 지단이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카를루스 케이로스를 새 감독으로 앉히고, 레알 베티스에게 신승을 거두는 것으로 국내 리그에서 첫 시작을 힘겹게 내딛었다.
2005-06 시즌에는 몇 명의 새 선수들이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했다: 줄리우 바프티스타, (€24M) 호비뉴, (€30M) 그리고 세르히오 라모스 (€27M) 가 그들이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는 몇 차례 형편 없는 결과를 냈는데, 2005년 11월에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안방에서 숙적 바르셀로나에게 0-3의 치욕적인 완패를 당했다. 당시 지휘봉을 잡은 반데를레이 루솀부르구가 다음 달에 경질되었고, 후안 라몬 로페스 카로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 짧은 상승세는 레알 사라고사와의 코파 델 레이 8강 1차전에서 1-6으로 패하는 것으로 금새 중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알 마드리드는 아스널에게 굴욕패를 당해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4년 연속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2006년 2월 27일,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사임했다.
2006년 7월 2일, 라몬 칼데론이 새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파비오 카펠로가 신임 감독으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가 새 단장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2006-07 시즌에 4년 만에 처음으로 라 리가 우승을 거두었지만, 카펠로 감독은 시즌 후 쫓겨났다. 2007년 6월 9일, 마드리드는 사라고사와 라 로마레다에서 원정 경기를 치렀다. 마드리드가 사라고사에게 1-2로 경기 막판까지 밀린 가운데 바르셀로나가 에스파뇰을 2-1로 앞섰었다. 뤼트 판 니스텔로이의 동점골이 터지고 라울 타무도가 또 역전골을 터뜨리면서 레알 마드리드 쪽으로 리그의 향방이 기울었다.
우승은 6월 17일에 결정되었는데, 마드리드는 마요르카와 베르나베우 안방에서, 다른 리그 우승 경쟁 구단인 바르셀로나와 세비야는 각각 짐나스틱과 비야레알을 상대했고, 전반까지 마드리드는 0-1로 끌려갔지만, 타라고나에서 3-0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막판 30분에 연달아 3골을 넣어 마드리드는 3-1로 이기고 2002-03 시즌 이래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쟁취했다. 동점골은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의 발에서 나왔는데, 곤살로 이과인이 잘 넘긴 공으로 골망을 갈랐다. 이후 자책골이 터지고, 레예스가 한 골을 더 터뜨려 마드리드가 우승을 자축할 수 있게 했다. 수천명의 레알 마드리드 지지자들은 우승을 자축하러 시벨레스 광장으로 이동했다.
2009년 6월 1일,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다시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페레스는 첫 번째 임기의 은하 군단과 마찬가지로 밀란으로부터 카카를 €70M에 영입해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94M에 들여와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을 한 번 더 깼다.
2010년 5월, 주제 모리뉴가 지휘봉을 잡았다. 2011년 4월, 사상 첫 엘 클라시코 4연전이 18일 사이에 치르는 것으로 확정되는 기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첫 경기는 4월 17일 라 리가 경기 (양쪽이 페널티킥을 1골씩 주고받아 1-1로 종료) 였고, 그 다음에 코파 델 레이 결승전 (마드리드의 1-0 승리로 종료) 이 그 다음 경기였으며, 그리고 논란을 수반한 4월 27일과 5월 2일자 바르셀로나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 2차전 (합계 1-3으로 패배) 경기가 가장 나중에 치른 경기였다.
2011-12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역대 최다인 32번째 라 리가 우승을 거두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구단 신기록이 세워졌으며, 이 중 한 시즌 승점 100점 적립의 기록을 세웠고, 121골을 득점했으며, +89의 골득실, 16번의 원정 경기 승리, 그리고 32번의 승리가 이 시즌 동안 세운 기록이다. 같은 시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스페인 리그 역사상 최단기간 100골 적립의 기록을 세웠다. 92경기에서 101골을 기록해, 호날두는 105경기에서 100골을 기록한 레알 마드리드의 거물 푸슈카시 페렌츠의 기록을 넘었다. 호날두는 한 시즌 최다골이라는 개인 기록 (60골) 을 세웠고, 한 시즌에 19개의 구단을 상대로 모두 득점을 올린 최초의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레알 마드리드는 2012-13 시즌을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바르셀로나를 원정 다득점으로 제쳐 우승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리그를 2위로 마쳤다. 이 시즌에 영입한 주로 선수로는 토트넘 홋스퍼의 모드리치로, 약 €30M에 영입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 2012-13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도르트문트, 맨체스터 시티, 그리고 아약스와 "죽음의 조"에 들어갔고, 승점 3점을 더 얻은 도르트문트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했다. 결선 토너먼트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6강전에서, 갈라타사라이를 8강에서 이기고, 3대회 연속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또다시 도르트문트에 발목이 잡혔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2013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연장전 접전 끝에 실망스럽게 패하면서, 페레스는 주제 모리뉴 감독이 시즌 말 "상호 합의"에 구단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2013년 6월 25일, 카를로 안첼로티가 3년 계약을 맺고 모리뉴의 후임으로 레알 마드리드 사령탑에 취임했다. 그 다음 날, 그는 마드리드의 기자 회견에 나와 지네딘 지단과 폴 클레멘트가 그의 수석 코치로 보좌할 것임을 발표했다. 2013년 9월 1일, 오랜 기다림 끝에 가레스 베일이 토트넘에서 이적했다. 이 웨일스인의 이적료는 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했는데, €100M 정도로 책정되었다. 안첼로티의 레알 마드리드 첫 임기에는 코파 델 레이를 우승했는데, 베일이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5월 24일, 레알 마드리드는 도시의 맞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2014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연장끝에 4-1로 이기고 2002년 이래 처음으로 유럽 정상에 올랐고, 구단은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처음으로 "10번째" 우승을 거둔 구단이 되었다.
UEFA 챔피언스리그 2013-14 우승을 거두고, 레알 마드리드는 케일러 나바스 골키퍼, 토니 크로스 미드필더, 그리고 하메스 로드리게스 공격형 미드필더를 영입했다. 구단은 세비야를 상대로 UEFA 슈퍼컵 2014 우승을 거두었는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2골에 힘입어 통산 79번째 공식 우승컵을 차지했다.] 2014년 여름 이적 시장 마지막 주에는, 전 시즌에 성공을 가져다 주었던 주축 선수 두명을 매각했는데, 샤비 알론소가 바이에른 뮌헨에, 앙헬 디 마리아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떠났고, 후자는 잉글랜드 역대 최고 이적료인 €75M의 기록을 세웠다. 구단의 결정은 논란의 도마에 올랐는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내가 책임을 졌다면,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우리는 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라고 인정했다.
2014-15 시즌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레알 소시에다드에게 패해 부진하게 시작한 후, 레알 마드리드는 연승 가도를 달렸는데, 이 중에는 바르셀로나전과 리버풀전 승리도 있었고, 종전에 2005-06 시즌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의 바르셀로나가 세운 스페인 최다 연승 기록인 18연승을 뛰어넘었다. 2014년 12월, 구단은 FIFA 클럽 월드컵 2014 결승전에서 산 로렌소와의 결승전에서 2-0으로 이기고 22연승 기록을 세웠고, 2014년을 4대회 우승으로 끝냈다. 22연승 행진은 2015년 첫 경기인 발렌시아전 패배로 종지부가 찍혔는데, 구단은 역대 최다 연승 기록인 24연승 기록으로부터 2승이 부족했다. 구단은 UEFA 챔피언스리그 (유벤투스와의 준결승전에서 합계 2-3으로 패배) 와 코파 델 레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합계 2-4로 패배) 정상을 방어하는데 실패했고, 라 리가 정상도 차지하지 못했고, (우승한 바르셀로나보다 2점이 모자라 준우승을 차지) 그 결과는 2015년 5월 25일, 안첼로티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2015년 6월 3일, 라파엘 베니테스가 3년 계약을 맺으며 레알 마드리드 신임 사령탑을 맡았다. 레알 마드리드는 11번째 경기에서 세비야에게 2-3으로 지기 전까지 무패행진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 경기인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 안방 경기에서 0-4로 대패했다. 마드리드는 카디스와의 코파 델 레이 32강 1차전 원정에서 3-1로 이겼다. 그러나, 징계로 경기 출전 자격이 없는 데니스 체리셰프가 출전하면서 2차전이 취소되었고, 레알 마드리드는 실격 처리 되었다. 선수단과 소통이 안되고 정상급을 상대로 호성적을 내느데 실패하여 구단 지지자들의 불만을 낳은 베니테스는 2016년 1월 4일에 경질되었다. 베니테스의 경질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선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승점 4점차였고, 2위이자 숙적인 바르셀로나와는 2점차 (1경기 차도 안되는 격차) 로 3위였다.
2016년 1월 4일 베니테스가 떠나면서 지네딘 지단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79] 지단은 베니테스의 전임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의 수석 코치를 역임했었고, 2014년을 기점으로는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의 감독이었다.[79] 지단 감독이 맡은 마드리드의 첫 경기는 2016년 1월 9일 데포르티보전으로 안방에서 가레스 베일이 해트트릭을 완성해 5-0 승리를 거두었다.[80] 5월 28일, 레알 마드리드는 11번째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두고,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또다시 경신했으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마지막 승부차기 주자로 나서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결승전을 0-0으로 비겼지만 승부차기에서 5-3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2016-17 시즌에는 라리가 우승을 이루었으며, 2017년 6월 4일(한국시간)에 웨일스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6~2017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경기에서 유벤투스를 4-1로 격파하여 챔피언스리그 사상 첫 2연패와 동시에 라 두오 데시마를 달성하였다. 이로써 레알 마드리드는 역대 최다 우승팀이자 1992년 현행 UEFA 챔피언스리그 체제가 자리 잡은 이후 최초로 2연패를 이룬 팀이 됐다.
2017-18 시즌에는 3위로 시즌을 마쳤으며 2018년 5월 27일(한국시간)에 우크라이나 키에프 올림피스키 경기장에서 열린 2017-2018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경기에서 베일의 멀티골 벤제마의 결정타 골로 리버풀을 3-1로 이기며 3연패와 동시에 라 데시모떼르세라를 달성했다.
'I LOVE SOCC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AFC 챔피언스리그 (0) | 2019.04.23 |
---|---|
K리그1 (K League 1) (0) | 2019.04.22 |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0) | 2019.04.21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0) | 2019.04.21 |
프랑스 리그 1 (0) | 2019.04.21 |